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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학산 6.25전쟁 영웅 김용식 일병

비학산 6.25전쟁 영웅 김용식 일병

김 일 권

 기북면에는 비학산이 있고 많은 역사적 사료들이 많고 전국 어디에 내어 놓아도 손색없는 아름다운 숲과 문화적 유산이 적지 않다. 과거 기북면이 기계면에서 분면이 되기 전에는 모든 기록에 기북 지명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는 독립된 특성화 된 지역으로 거듭나고 있다. 전국에서 가장 작은 기북면이지만 기북면의 고유한 문화와 아름다운 역사는 새롭게 일깨워 져야한다.

 비학산의 이름은 ‘학이 알을 품고 나는 모습’ 같다고 해서 비학산이라 지어진 것이다. 기북초등학교 교가의 첫 머리에 비학산이 나온다. ‘창공에 빼어 솟은 비학산 아래 화랑 놀던 손얼벌’ 이라고 나온다.

 이 산은 예부터 명당자리가 있어 사람들이 몰래 묘를 쓰기도 한다. 가뭄이 극심할 때는 기북면 사람들은 모두 비학산에 올라가서 산 정상에 누군가 몰래 쓴 이 묘지를 파헤치고 기우제를 지낸다.

 6.25전쟁에서 낙동강 방어선은 최대의 격전지 최후의 방어선이었다. 이 방어선중 동부전선에서 최고의 요충지는 비학산, 이곳을 탈환하기 위해 비학산 영웅들의 목숨 바친 빛나는 전투가 있었는데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모르고 있다.

 ‘낙동강 방어선을 빛낸 영웅 비학산 특공대’ 육군은 6.25전쟁 발발 60주년을 맞아 육군본부 회의실을 ‘6.25 전쟁영웅실’로 새롭게 단장하고. 이곳에 전쟁영웅 6명의 활동상을 전시하였다.

 그 6명중 두 명이 비학산 특공대로 싸웠던 김용식, 홍재근 이병이다. 이들은 1950년 8월 25일 낙동강방어선 최고의 격전지 비학산 쟁탈전에서 특공대를 자원해 북한군 유격부대 은거지를 기습해 탈환했다. 1951년 7월26일 정부는 그들에게 최고훈장 태극무공훈장과 일계급 특진을 추서하였다.

 

1. 김용식 일병의 생애1931년 2월 8일 경기도 옹진군 부관면 적석리에서 출생한 김용식(金龍植) 일등병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6.25전쟁이 발발하기 직전인 1950년 5월 자원입대하였다.

 그는 당시의 급박한 전선 사정으로 인해 제대로 된 훈련과정을 거치지 못하고 입대한 지 1개월만에 제주도 신병훈련소를 나와 이등병의 신분으로 수도사단 제17연대 3대대에 배속되어 제9중대 3소대의 소총수로 전장의 최일선에 투입되었다.

 김용식 이등병은 비학산전투 이후 1950년 9월 19일 안강 시가지 전투에서 척후임무를 맡아 정찰을 실시하던 중 북한군의 만행을 목격한 뒤 소대원들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적 6명과 조우하여 이들을 모두 사살하고 자신도 그 자리에서 장렬히 전사하였다.

 정부는 김용식 이등병의 희생정신과 감투정신을 높이 평가하여 1951년 7월 26일 군인 최고의 영예인 태극무공훈장을 수여하였으며, 1954년 10월 15일에는 화랑무공훈장과 일계급 특진이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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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공적1950년 8월 북한군 제2군단 예하 제12사단은 청송과 도평리를 거쳐 입암리에 집결해 있었고, 동해안에 상륙하였던 북한군 제766유격부대는 향로봉과 비학산을 거쳐 안강-기북 일대의 전선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안강-기북지역의 방어를 위해 배치된 수도사단은 북한군 중 정예부대인 제12사단과 제766유격부대가 위치하고 있던 비학산을 확보하기 위해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다.

 제17연대 3대대가 비학산 점령을 위해 특공대를 선발하였을 때 신병훈련을 마치고 전입한지 얼마 되지 않은 김용식 이등병은 홍재근 이등병과 함께 이에 자원하였다.

 김용식 이등병은 홍 이등병과 함께 적 제766유격부대 은거지를 기습하여 치명적인 타격을 입히는가 하면 비학산 공격에서는 돌격작전의 선봉에 서서 적진지를 측면기습, 진지 내 적 군관 1명을 포함한 15명의 포로를 생포하는 전공을 세워 군인정신의 표상이 되는 한편 1951년 7월 26일 태극무공훈장(훈기번호 제12호)을 수여받았다.낙동강방어선 형성에 있어 길안 일대에 방어편성을 하고 있던 수도사단은 제1연대를 추목동, 제18연대를 그 우측고지 일대에 배치하고 배속된 기갑연대를 진보 남쪽 비봉산 일대에 독립기갑연대와 강원경찰대대에 배치하였다.

 8월 5일부터 적의 대규모 공격을 받기 시작한 수도사단은 순식간에 방어선이 와해됨에 따라 의성으로 철수하였다. 이에 따라 청송-기북 축선은 무방비 상태로 놓이게 되었고, 적 제12사단은 기북-기계를 거쳐 포항에 이르기까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게 되었다.

 8월 9일 무방비 상태로 있던 기계가 적 제12사단에 의해 피탈되었다. 기계는 동부지역에서 포항이나 안강으로 이르는 도로상의 요지로서 기계를 상실한 국군이 동부전선에서 일대 위기를 맞게 되자 제1군단은 의성에 집결한 수도 사단을 안강으로 이동시켰다.

 8월 13일 군단명령에 따라 수도사단의 작전이 전개되었다. 제17연대는 육전대와 함께 안강 북쪽고지를 공격하였고, 제26연대와 제1연대도 제17연대의 좌우측 고지로 진출하여 진지를 점령하였다. 제17연대가 기계 남쪽고지를 탈환한 후 기계를 향해 전진하는 한편 제1연대 3대대는 우측의 포항터널 부근까지 진출하였고, 제18연대 1대대는 기북 용기동 일대의 고지를 점령한 후 기계 측방을 위협하였다. 부분적인 역습을 시도하던 적은 퇴로가 차단될 위협을 느끼자 비학산 일대로 퇴각을 시작하였다.

 기계탈환을 위한 총공격이 18일 미명에 개시되었다. 북쪽에서 제18연대가 기계로 진입함과 동시에 제17연대 1대대는 남쪽에서 시내로 진입하자 적 제12사단은 많은 전사자를 남겨둔 채 일부 패잔병만이 비학산 일대로 철수하였다.

 제17연대는 22일부터 비학산 일대의 적에 대한 공격을 감행하였으나 지형을 이용한 적의 완강한 저항으로 실패하게 되었다. 오히려 적의 역습을 받은 제18연대가 인비동선으로 물러나게 되어 제17연대도 전선 균형을 위해 기북 북쪽 외곽고지로 철수하였다.

 8월 26일 야간부터 기북 정면의 적은 대규모 공격을 감행해왔다. 미처 진지를 점령하기 전에 적의 공격을 받은 제17연대는 새벽녘에 기북을 빼앗겼다가 27일 반격을 통해 재탈환하였으나 적의 역습으로 남쪽고지 일대에서 격전을 전개하고 있었다.

 29일 새벽 잭슨부대 전차와 포병의 근접지원을 받은 제17연대는 반격을 감행, 기북을 재탈환하였으나 적의 역습으로 다음날 다시 기북을 적에게 넘겨주고 남쪽으로 철수하여 방어진지를 편성하였다.

1950년 8월말 기북-포항전선은 소규모의 정찰전이 벌어질 정도로 소강상태가 유지되었다. 8월 15일까지 부산 점령을 목표로 하였던 북한군은 8월 한 달간 총공세를 펼쳤으나 낙동강 교두보 돌파에 실패함으로써 당초 목표에 큰 차질을 가져왔다.

 기북 탈환을 위한 수도사단의 총공격으로 인해 막대한 손실을 입은 적 제12사단은 전사자를 남겨둔 채 일부 패잔병을 수습하여 비학산으로 철수하였다. 적은 이곳에서 2,000여 명의 병력을 보충 받아 제12사단 및 제766부대를 재편성하고 공격준비에 돌입하였다.

 제18연대는 비학산 탈취를 위해 수차례에 걸친 공격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고 오히려 적의 야간기습을 받아 엄청난 피해를 입고 제17연대에 작전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이후 북한군 제12사단과 수도 사단 제17연대는 비학산 확보를 위해 치열한 교전을 전개하였다.

 비학산 탈취를 위한 계속된 공격에도 불구하고 성공적으로 작전을 이끌지 못한 데에는 북한군 제766유격부대가 있었다. 이 부대는 야간기습을 통해 아군에게 많은 피해를 입혀 작전에 차질을 가져오게 하였다. 따라서 제17연대는 이들 부대의 격멸을 위한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마침내 정찰병에 의해 유격부대의 근거지를 알게 된 제17연대장은 제3대대장에게 제766유격부대를 습격할 것을 하달하였고, 그 임무는 결국 제9중대장에게 부여되었다.

 중대장은 제766부대 습격임무를 평소 전투력이 제일 막강하다고 판단했던 제3소대에게 맡겼다.

 소대장은 임무를 수행할 특공대를 선발하기 시작하였는데, 이 중 제일 먼저 지원한 2명의 병사 중 한 명이 김용식 이등병이었고 또 다른 한 명은 홍재근 이등병이었다. 그들은 제주도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수도 사단 제17연대 3대대 9중대 3소대에 배치된 지 며칠 지나지 않은 신병들이었다.

 김 이등병과 홍 이등병은 전투경험이 많은 고참병들도 겁내는 돌격작전의 첨병을 자원하였다.대열의 선봉에서 적진으로 돌진하던 김용식 이등병과 홍재근 이등병은 전방의 움직이는 물체를 발견하고 은밀히 접근해갔다. 적 경계병에게 다가간 그들은 신속하게 처치하고 정상 부근의 적 은거지에 접근하였다.

 기습적인 사격과 과감한 수류탄 투척으로 적의 은거지는 초토화되었으며, 다시는 아군을 기습할 수 없을 정도로 치명적인 타격을 입고 결국에는 북한군 제12사단에 흡수되었다.

 1950년 8월 24일 치열했던 비학산 쟁탈전에는 김용식 이등병과 홍재근 이등병이 공격대열의 선봉에 있었다. 우연히 적의 자동화기 진지 옆까지 포복으로 다가간 두 신병은 앞만 보고 열심히 사격하는 자동화기 사수와 지휘하는 군관을 대검으로 협공, 김용식 이등병은 군관을 덮치며 허벅지를 찌르고 홍재근 이등병은 경기관총 사수와 부사수의 옆구리를 찌르는 등 수 명의 적을 무찔렀다.

 이처럼 이들 두 신병은 북한군 군관을 포함한 15명의 적을 사살하거나 생포하였으며, 이들 중에는 1개 분대 전원을 생포하는 엄청난 전과도 거두었다.

이들의 희생이 있었기에 오늘의 대한민국이 있는 것이다. 포항시에서는 이들을 기억할 수 있도록 기념비 같은 무엇인가를 만들어야할 의무가 있다. 새로 당선된 시장님과 시의원들이 6.25를 기억하면서 무엇인가를 할 수 있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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